지금이야 석유 수출로 펄펄 날며 석유수출국기구인 OPEC과 맞짱 뜨고 있는 미국이지만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석유 순수입국일 뿐이었다. 막대한 원유 자원을 보유하며 생산량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이 우리와 달랐을 뿐 원유 수입에 의존한다는 점은 같았다. 산유국 미국은 오랜 세월 법으로 원유 수출을 금지할 정도였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석유를 소비하며 수출 여력이 없던 탓이었는데, 이제는 세계 석유 수급과 가격을 주도하는 ‘스윙 프로듀서(swing producer)’로 칭해도 손색이 없을 위치에 서있다.
생산량을 조절해 석유 수급 균형을 맞출 능력을 갖춘 산유국을 의미하는 스윙 프로듀서는 일반적으로 사우디로 지칭되어 왔는데 이제는 미국이 셰일원유 시추공 수를 통해 원유 생산량과 유가를 조절하는 능력자가 되고 있다. 텍사스 등 미국 내 대표적인 셰일원유 분지에는 지금도 새로운 시추공이 박히고 있고 수송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송유 파이프라인 확장까지 추진되면서 미국 상표 원유가 전 세계로 팔려 나갈 기회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미국산 원유 도입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미국이 석유 수출국으로 나설 수 있고 세계 석유 수급과 가격까지 조절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주한미국대사가 원유 세일즈에 나선 배경
에너지 메이저 기업인 비피(BP)가 2018년 발행한 세계 에너지 통계에 따르면 미국은 세계에서 9번째로 많은 석유 매장량을 기록 중이다. 약 500억 배럴 규모의 매장량이 확인돼 세계 원유 중 2.9%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석유를 소비하던 탓에 오랜 기간 원유 순 수입국 지위를 유지해왔다. 미국이 석유 수출에 나선 것은 불과 수년 전의 일이다. 지난 2016년 1월, 주한미국대사관의 요청으로 당시 마크 리퍼트(Mark W. Lippert) 대사를 인터뷰했던 기억이 있다. 미국 상무부 스테판 시릭(Stefan Selig) 국제무역 차관이 방한해 우리나라 산업통상자원부 차관과 에너지 협력을 논의하던 시점, 주한미국대사관의 요청으로 이뤄진 인터뷰였는데 메시지는 간결했다. ‘미국의 원유가 수출되면 한국의 에너지 안보 다변화에 기여하게 될 것’ 미국산 원유에 대한 일종의 마케팅 홍보를 했던 셈이다. 주목할 대목은 미국 상무부 차관이 방한하고 주한미국대사가 자국 원유 수출 관련 인터뷰에 나서기 한 달 전, 미국은 과거 40여 년 동안 금지했던 원유 수출을 전격 허용했다는 점이다. ‘2016년 통합세출예산법(Consolidated Appropriations Act, 2016)’을 논의하던 미국 상하 양원은 2015년 12월 18일, ‘미국산 원유에 대한 수출규제 해제 조항’을 통과시켰고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석유를 본격 수출할 수 있는 법률적 기반이 마련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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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받던 셰일오일이 미국을 석유 수출국으로
미국이 40여 년의 금기를 깨고 석유 수출에 나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잘 알려진 것처럼 비전통자원인 ‘셰일오일’ 혁명에서 비롯되고 있다.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진흙으로 형성된 퇴적암 사이사이에는 원유가 숨어 있었지만 생산이 어렵고 경제성도 떨어져 외면받아 왔다. 하지만 수압파쇄, 수평시추 공법이 개발돼 채굴이 가능해졌고 기술 진화로 생산 원가가 낮아지면서 이제는 미국을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이자 수출국 지위에 올려놓는 일등 공신이 되고 있다.
실제로 OPEC이 감산을 통해 유가 부양을 시도하고 있지만 미국의 셰일원유 생산량이 증가하고 수출도 확대되면서 산유국 카르텔의 시장 통제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는 지난해 발간한 에너지 시장 보고서에서 미국 셰일오일이 세계 원유 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글로벌 시장 조사 기관인 IHS 마킷(IHS Markit) 자료를 인용해 미국 내 대표적인 셰일오일 분지인 페르미안(Permian) 석유 생산량이 2017~2023년 사이에 하루 약 300만 배럴 증가할 것이며 2023년 생산량은 일산 540만 배럴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물량은 같은 기간 세계 석유 생산 증가량의 6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향후 원유 생산은 미국 셰일오일이 주도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이제는 글로벌 메이저까지 셰일원유 개발에 눈독
미국은 세계 최대 셰일원유 생산 국가이다. 텍사스 서부와 뉴 멕시코 동부에 걸쳐 있는 페르미안(Permian) 분지는 미국 최대 셰일원유 생산 지역이다. 전통 원유 자원으로 세계 에너지 시장을 주도하던 메이저 기업들도 이제는 셰일 원유 생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엑손모빌(ExxonMobil)은 2017년에 56억불을 들여 페르미안 분지 셰일원유 생산 업체를 인수했다. 엑손모빌은 특히 향후 원유 생산 증가 대부분을 미국 페르미안 분지에서 확보하겠다는 전략을 통해 대규모 투자 계획도 발표했다. 엑손모빌은 페르미안 분지에서 생산되는 셰일원유의 수송 능력 확대를 위해 송유관 건설에도 투자하고 있다. 비피(BP) 역시 페르미안 셰일원유 자산 인수를 위해 지난해 105억불을 투자하면서 최대 규모 M&A 거래를 기록했다. 쉐브론(Chevron)은 올해 투자 예산의 18%에 해당되는 36억불을 페르미안 분지에 투입하는 한편 향후 3년간 자본 투자 예산 절반을 셰일원유 개발에 집중할 계획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규모 독립계 회사 위주로 이뤄지던 페르미안 분지 개발에 글로벌 메이저 기업들이 속속 참여하면서 생산 능력과 시장에 미치는 파괴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셰일원유 손익분기 가격은 갈수록 낮아지고!
외면받던 비전통자원 셰일원유는 채굴 기술 진화로 세계 원유 수급과 가격을 주도하는 위치로 부상 중이다. 그런데 더 눈여겨볼 대목은 셰일오일 생산 손익분기 가격이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때 배럴당 100불이 넘던 국제유가가 반토막 나며 40~50불대로 떨어지던 2015년 즈음, 석유수출국기구인 OPEC이 유가가 떨어지는 것을 인내하면서까지 생산량을 줄여 유가 부양에 나서지 않았던 배경 중 하나는 생산 원가가 높은 셰일원유 개발을 묶어 두기 위한 고육책으로 이해되어 왔다. 전통자원에 비해 셰일원유 생산비용이 높아 저유가 기조 아래서는 수익을 낼 수 없다는 당시의 정책적 판단은 하지만 이제는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미국 셰일오일 생산 업체의 효율성이 눈에 띄게 개선되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 컨설팅 업체인 미국 라이스타드(Rystad)에 따르면 미국 셰일 프로젝트의 40%가 WTI 유가 기준으로 배럴당 45달러 선이면 생산 가능하다. 셰일원유를 생산하는 기술이 진화됐고 채굴량이 늘어나면서 채산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라이스타드에 따르면 탑(TOP) 50에 포함된 셰일오일 자산중에는 손익분기 유가가 배럴당 19불대에 그친 사례도 확인됐다. 주목할 대목은 라이스타드가 조사한 WTI 손익분기 유가에는 시추·완결 비용, 리스 비용, 세금, 로열티, 수송비, 판매관리비, 유가 할인액이 모두 반영됐다는 점이다.
미국 원유 생산량 중 1/3이 수출 중
셰일오일 개발 붐을 등에 업고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괄목할만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미국의 하루 원유 생산량은 2016년에 890만 배럴에 불과했는데 2017년 940만 배럴, 지난해는 1090만 배럴까지 늘어났다. 올해 생산량은 하루 1200만 배럴을 상회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미국내 원유 생산량 증가는 셰일오일이 주도하고 있다. EIA는 올해 미국 석유 생산 증가가 페르미안(Permian)과 바켄(Bakken) 등 셰일원유 생산 분지에 집중될 것으로 전망했다. 국제에너기기구는 미국 셰일원유 생산량이 오는 2025년에 하루 920만 배럴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셰일 기반 원유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미국 원유 수출 역시 꾸준히 증가해 올해 3월 현재 하루 360만 배럴에 달한다는 분석이다. 미국 내 현재 원유 생산량 중 1/3에 가까운 물량이 수출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도 미국산 원유 수출의 주요 타깃이 되고 있다. 미국 원유 수출이 허용된 첫 해인 2016년 244만 배럴이 도입됐는데 지난해에는 6094만 배럴까지 늘었다. 2년 사이 25배 가까이 증가한 것인데 올해는 2월까지 벌써 2093만 배럴의 원유가 도입됐다.
WTI 가격 경쟁력 개선, 미국 원유 인기 비결
미국 셰일오일 개발과 생산이 확대되고 가격 경쟁력까지 개선되면서 석유수출국기구인 OPEC 입지마저 위협할 수준이 되고 있다. 브렌트, 두바이유와 더불어 세계 3대 원유 가격 지표 중 하나인 서부텍사스중질유(WTI)는 20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가격이 가장 높게 형성됐는데 이제는 가장 저렴하다. 브렌트, 두바이유와의 가격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면서 그만큼 미국 원유 수출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이 원유 수출을 첫 허용한 2016년 WTI 평균 가격은 브렌트에 비해 배럴당 1.6달러가 낮았다. 하지만 2017년 이후 WTI 가격경쟁력이 높아지면서 격차가 커지고 있다. 2017년 WTI 평균 가격은 배럴당 50.85달러를 기록해 두바이유 보다 2.33달러, 브렌트 대비 3.89달러 낮게 형성됐다.
WTI 가격이 낮아지면서 미국 원유 수출도 늘었는데 2016년 기준 하루 평균 59만 배럴에 그치던 것이 2017년에는 그 두 배 수준인 112만 배럴까지 늘었고 지난해는 200만 배럴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올해 들어서는 배럴당 8~9달러 선까지 낮게 형성되고 있고 수출량은 하루 평균 300만 배럴 수준을 기록 중이다. 유가 부양을 노린 OPEC은 올해 1월을 기해 생산량 감축에 나섰는데 이에 대한 미국 전직 정책 관료의 분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 오바마 정부 당시 에너지정책관이었던 제이슨 보르도프(Jason Bordoff)는 올해 1월 시행된 OPEC+(OPEC의 비회원 산유국 10개 국가 포함)의 감산이 유가 추가 하락을 막겠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셰일원유 생산이 늘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OPEC+가 생산량을 줄여 유가가 오르면 수익성이 높아진 미국 셰일원유 업계 시추공이 더욱 바빠져 생산이 늘어나는 연쇄 반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주목할 대목은 셰일원유 공급이 늘어나면 유가는 다시 하향 안정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IEA는 최근 발표한 중기 석유 수급 전망에서 오는 2024년에는 미국이 사우디를 제치고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세계 원유 시장에서 스윙 프로듀서로서의 미국 역할이 더욱 견고해지고 유가 부양을 노린 OPEC 카르텔의 영향력은 축소될 것이라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으니 이제 세계 원유 시장의 눈과 귀는 미국을 향하게 생겼다.